대형 신인으로 한국의 미래를 이끌 강속구 투수로 주목받던 장재영이 결국 투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타자로 전향했다. 투수로 성장해 타자로 변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워낙 뛰어난 야구 자질을 가진 유망주들의 새로운 도전은 흥미롭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해 성공가도를 달린 선수는 누구일까? 쉽지 않은 어려운 변신의 길을 택해 성공한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한 선수들을 되돌아보자. 우선 전제돼야 할 것은 투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이전 야구에서는 투수도 하고 타자도 하는 이도류가 즐비했다. 어느 정도 야구를 할 수 있다고 하면 던지기도 두드리기도 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야구 시절의 투타 겸업 선수들은 가능하면 제외하려고 한다. 이런 잣대를 들이대 보면 내 개인적인 생각에 원조 전향 성공 선수는 롯데 호랑나비 김은국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좌완 투수 김은국은 1988년 롯데 2차 2라운드라는 상위 지명을 받아 롯데에 입단했다. 대학 시절 김은국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왼손 투수로 나름대로 어려운 공을 던지는 좋은 투수였다. 입단 당시 스프링캠프에서 롯데 벤치의 호평을 받은 김은국은 데뷔 첫해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몇 경기를 망치고 2군으로 내려간 김은국에게 1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웃기지만 당시 2군은 선수가 부족했고 투수는 투수만 하고 타자는 타자만 하고 경기를 할 수 없었다. 결국 깍두기처럼 투수도 부족한 타자를 메우기 위해 타석에 서고 타자도 마운드에 서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김은국은 2군에서 종종 타석에 나와 영양 만점 안타를 때려냈다. 심지어 만루홈런을 기록한 경기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당시 롯데 2군 감독 이성득은 김응국에게 타자 전향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타자 김응국이었다. 김응국은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롯데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 잡으며 전성기를 맞았다. 정확한 타격과 빠른 발로 롯데의 중심타자로 성장한 김은국은 1996년까지 출전하면 3할을 보장하며 대한민국 대표 교타자로 자리매김했다. 2015시즌 동안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 김은국은 통산 타율. 293, 61개의 3루타를 양산했다. 3루타 61개는 통산 3루타 개수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대형 신인으로 한국의 미래를 이끌 강속구 투수로 주목받던 장재영이 결국 투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타자로 전향했다. 투수로 성장해 타자로 변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워낙 뛰어난 야구 자질을 가진 유망주들의 새로운 도전은 흥미롭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해 성공가도를 달린 선수는 누구일까? 쉽지 않은 어려운 변신의 길을 택해 성공한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한 선수들을 되돌아보자. 우선 전제돼야 할 것은 투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이전 야구에서는 투수도 하고 타자도 하는 이도류가 즐비했다. 어느 정도 야구를 할 수 있다고 하면 던지기도 두드리기도 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야구 시절의 투타 겸업 선수들은 가능하면 제외하려고 한다. 이런 잣대를 들이대 보면 내 개인적인 생각에 원조 전향 성공 선수는 롯데 호랑나비 김은국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좌완 투수 김은국은 1988년 롯데 2차 2라운드라는 상위 지명을 받아 롯데에 입단했다. 대학 시절 김은국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왼손 투수로 나름대로 어려운 공을 던지는 좋은 투수였다. 입단 당시 스프링캠프에서 롯데 벤치의 호평을 받은 김은국은 데뷔 첫해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몇 경기를 망치고 2군으로 내려간 김은국에게 1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웃기지만 당시 2군은 선수가 부족했고 투수는 투수만 하고 타자는 타자만 하고 경기를 할 수 없었다. 결국 깍두기처럼 투수도 부족한 타자를 메우기 위해 타석에 서고 타자도 마운드에 서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김은국은 2군에서 종종 타석에 나와 영양 만점 안타를 때려냈다. 심지어 만루홈런을 기록한 경기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당시 롯데 2군 감독 이성득은 김응국에게 타자 전향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타자 김응국이었다. 김응국은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롯데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 잡으며 전성기를 맞았다. 정확한 타격과 빠른 발로 롯데의 중심타자로 성장한 김은국은 1996년까지 출전하면 3할을 보장하며 대한민국 대표 교타자로 자리매김했다. 2015시즌 동안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 김은국은 통산 타율. 293, 61개의 3루타를 양산했다. 3루타 61개는 통산 3루타 개수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롯데 김응국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성공 가도를 달렸다 롯데 김응국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성공 가도를 달렸다
김응국 이후 생각나는 선수는 인생은 이호준처럼의 이호준과 국민타자 이승엽이다. 1994년과 1995년 각각 해태와 삼성에 입단한 이호준과 이승엽은 모두 투수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호준은 남다른 야구 재능을 지닌 선수였지만 근성과 개성이 강한 성격으로 방황의 시간이 길었다. 프로에 와서도 대단한 구위로 코칭스태프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막상 경기에 나가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6년 어깨 부상까지 겪으며 타자로 전향했지만 이호준은 여전히 야구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1997년 원조 이도류의 김성한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호준은 달라졌다. ‘큰손’을 알게 된 김성한 감독은 장성호와 함께 이호준을 해태의 중심 타자로 지목해 피나는 훈련을 시켰다. 팀의 진심을 알게 된 이호준은 뒤늦게 땀을 흘렸다. 결국 끼와 훈련이 합쳐지자 이호준의 진가는 빛나기 시작했다. 아쉬운 점은 해태가 자금 사정에 시달리며 암흑기를 달리던 시절 외롭게 해태의 4번을 지킨 외로운 타자가 이호준이었다. 결국 SK로 자리를 옮긴 이호준은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가 싶었으나 베테랑으로 NC로 이적해 부족한 팀 타선을 이끌고 부활했고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극찬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승엽은 이기적이었던 이호준과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고교 시절 경북고를 청룡기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 투수상을 받은 대단한 투수였던 이승엽은 팔꿈치 부상으로 프로 입단 후 일찌감치 타자로 전향했다. 워낙 성실했던 성격상 삼성의 호화 코칭스태프는 모두 이승엽을 좋아했다. 최고의 스승이었던 박승호 코치에게는 타격의 기본을 익혔고 당시 감독이었던 우영덕 감독은 고졸 전향 타자를 곧바로 1루수로 실전에 투입했다. 데뷔 이듬해였던 1996년에는 새로 부임한 백인천 감독이 “미래 한국 대표 4번 타자는 이승엽”이라며 자신의 외발 타법을 이승엽에게 전수했고, 이승엽은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1997년 타율 0.399로 타격 2위에 올랐던 이승엽은 최다 안타, 홈런왕, 타점왕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4번 타자로 성장했다. 입단 3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후 이승엽의 활약은 굳이 여기에 기술하지 않는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선수 중 가장 성공한 선수 중 한 명이 이승엽이다. 이 다음 세대는 바로 천재 야구선수들이다. 1982년 동갑내기 황금 세대로 이들은 공교롭게도 부산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성장했다. 바로 부산상고 채태인, 경남고 이대호, 부산고 추신수다. 이들은 모두 투타 탁월한 재능으로 주목받았다. 채태인은 당시 고교 좌완 투수로는 드물게 140km가 넘는 직구를 던졌다. 보스턴 레드삭스 아시아 담당 스카우터는 채태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일찌감치 채태인의 미국행을 권유했다. 아쉬운 것은 부산상고 시절 채태인은 이미 어깨 부상을 당했다. 미국행 욕심에 부상을 숨긴 채 테인은 미국에서 제대로 된 공을 던지지 못했지만 의욕만 앞섰다. 결국 관절순 손상이라는 심각한 부상까지 당한 뒤 채태인은 야구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스턴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한국에 돌아온 채태인은 먼 길을 돌아 삼성 김응룡 당시 사장의 눈에 띄어 2007년 삼성에 입단할 수 있었다. 채태인의 한국 프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될 듯 말 듯, 터질 듯하면 부상의 악령에 시달렸다. 삼성을 거쳐 넥센과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SK에서 타율 0.280을 기록했지만 재계약에 실패해 쓸쓸한 은퇴를 맞았다. 이름에 비해 아쉬운 선수 생활이었지만 채태인은 통산 14시즌을 한국 프로에서 뛰며 통산 0.298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순탄치는 않았지만 채태인의 천재성은 빛나지 않은 성적이었다. 이대호는 이승엽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타자다.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워낙 뛰어난 신체조건으로 초등학교 시절 이미 고등학생 같은 신체조건을 자랑했다. 롯데는 2001년 지역 연고 1지명으로 이대호의 라이벌 추신수를 지명했다. 그리고 2차 첫 번째 순서를 쥐고 있던 SSG가 신생팀 특권으로 3장의 2차 1지명권을 쥐고 있었지만 이대호를 지명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이대호는 롯데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이대호가 탁월한 신체조건과 성적에도 불구하고 이런 푸대접을 받은 것은 이대호가 투수로서는 가치가 떨어졌다는 점이다. 190cm가 훨씬 넘는 키로 공을 던지지만 이대호의 구속은 평범했다. 여기에 프로 후 부상이 겹치면서 이대호는 일찌감치 투수로서는 어렵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렇게 타석에 들어선 이대호였지만 타석에서는 전혀 달랐다. 덩치와 달리 유연한 타격으로 한국 일본 미국 무대를 누볐다. 마흔 살임에도 최고의 기량을 보인 이대호는 박수를 칠 때 우아하게 은퇴의 길을 걸었다. 추신수도 천재의 길을 걸었다. 고교 시절 투수를 선택할지 타자를 선택할지 망설여질 정도로 투타, 주루, 수비 능력 등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다. 한국 무대보다 큰 무대인 미국을 선택한 추신수는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고교 때까지 주로 투수였던 추신수가 미국에서 타자를 선택한 것은 의외로 단순한 이유였다. 키 180cm 안팎의 스몰 사이즈 핸디캡 때문이었다. 미국 무대에서 이 정도 키로는 대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시애틀 벤치는 추신수를 타자로 성장시켰다. 추신수는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해 최고의 출루율로 메이저리그를 뒤흔들어 추추트레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가 된 추신수는 텍사스의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하다 한국 SSG에서 황혼을 불태우고 있다. 이들 외에 현재 KIA 최고 타자 나성범도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해 최고의 주가를 날리고 있는 선수다. 야구는 타고난 것이다. 타고난 천재성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최고의 투수라면 이미 타고난 재능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투수를 그만둘 수는 있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최고의 타자가 될 수 있다. 장재영도 그들의 선배들처럼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가까운 선배 이현정도 있지 않나? 김응국 이후 생각나는 선수는 인생은 이호준처럼의 이호준과 국민타자 이승엽이다. 1994년과 1995년 각각 해태와 삼성에 입단한 이호준과 이승엽은 모두 투수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호준은 남다른 야구 재능을 지닌 선수였지만 근성과 개성이 강한 성격으로 방황의 시간이 길었다. 프로에 와서도 대단한 구위로 코칭스태프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막상 경기에 나가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6년 어깨 부상까지 당했다